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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15. <요재공>찰방공휘정현유사(察訪公諱廷顯遺事)
1. 문헌 목록 〉14. 14世 〉17. <부정공>학생공휘완보묘표(學生公諱完寶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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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정공>학생공휘유춘가장(學生公諱維春家狀)
學生公諱維春家狀 我朝 顯 肅之世治隆俗美固非後世所能及之盛時也府君生長於斯世富蘊抱需經濟於厥身不肯官祿隱淪草野爲昭代之遺民而止求其同德於古則若居볌畝遺之以安龐山民可與爲儔也府君姓趙氏諱維春字元瑞系出玉川檢校大將軍諱璋始顯于開京中葉爲初祖至曾孫諱元吉有大勳勞封玉川府院君號農隱諡忠獻子虔谷瑜典農寺副正及麗運將訖不應 本朝徵命罔僕自靖 世宗命旌幷褒忠孝武夷謙川兩世享祠孫縣監智崑輿地誌著治績相好著友義七世以上也高祖諱大承縣監曾祖諱珏奉事祖諱義吉通德郎考諱時耈隱德行義鄉人以處士稱焉妣豊川盧氏司宰監正胋女密陽朴氏在春女府君朴氏出也 顯宗元年庚子十一月二日生天姿溫厚敦慤品性愷悌慈良處士公三十七歲晩生而鍾愛之敎有法度至微細事無毫分放過於規矩故有學文之力未嘗餙貌矯情取悦於孝友天至事親能免養服勤無方愛弟妹益篤有無相資從弟維城以族叔時夏之子系季父時鼎之后處士公恩愛隆洽敎養無間於己子文雅見譽晚築四友軒於林下府君亦盡友于之義幷二弟日相湛和於軒軒榜之四友抑取諸一義於此耶訓諸子諄諄以孝悌之道治家有法量八出稱有無禁奢華存嬴餘而奉祭祀接賓客竭其誠敬見義必爲如嗜欲然如其非義視之若浼有頏廉懦立之風憂憂樂人樂遇事坦然恢恢有容物量以傑士見稱於時 肅廟朝朴候斗世莅府服府君之風義設榻者累矣固守未嘗至室之戒於是知府甚加敬禮或有疑難輒就諮詢則府君終辭以公私殊塗不敢質對也知府嘆其賢以養德能以制事將有大需輔世沈晦遐陬躬耕以終身誠可見安分知幾爲一鄉之善士也日處士公遘疾在床府君焦侍湯夜不解帶竟以天年終幾至於徑情傷生家中長老以陳既傷不孝之戒乃自強不怠厚其衣衾美其棺槨以期恔心吊者莫不感歎其衰絰之備禮哭泣之盡哀葬祥禫亦致情文靡缺其孝友風義至著郡誌而人到于今稱之辛丑八月考終于寝享年六十二墓道理峰祖考通德郎公墓左麓申坐原配清州韓氏通政勉吾女甲辰十二月十日生忌正月十八日墓別葬于弓角村后皷岩洞左崗蟻亭嶝姑朴氏塋下亥坐育二男后配利川徐氏命履女辛酉十二月八日生忌二月三日墓道理峰案山巳坐育二男光耘東耘韓氏出相耘成耘徐氏出長房無育子次房男重命次房三男重命斗命新命三房男天命四房男載命曾孫廷良廷仁光山金璲全州李뤲妻重命二男二女廷烈廷直昇平朴聖燁漢陽趙時良妻新命二男二女廷華天命男廷奎載命男嗚呼府君高尚其志謝絶榮塗無枉己循人之私違道干譽之汚攻其學進其德優游於名敎中樂地卒歲聊自誤視諸巧言令色屈於人下不知爲耻者固不可同日而語則豈非知命之達人乎吁亦盛矣自後屢世無路仕進服力田疇清苦資生家道索矣弟其狀德與竁銘之備述尚不得籍於立言家闡揚則曷敢望不朽於久遠乎是懼而窃識之然旋恐漏其十百而擧其一二焉 七世孫 炳寬 謹識 학생공휘유춘가장(學生公諱維春家狀) 아조(我朝) 현종(顯宗), 숙종(肅宗)시대는 정치를 잘하였고 풍속이 아름다와 진실로 후세에 미치지 못할 왕성한 때였다. 부군이 이 時代에 태어나 遠大한 포부와 濟民할 수 있는 능력을 몸에 간직하고도 즐겨 관록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밝은 성대에 숨겨지고 말았으니 덕망이 그와 같은 사람을 고대에 찾는다면 안방산민(安龐山民)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부군의 성은 조씨요, 휘는 유춘(維春), 자는 원서(元瑞)로 옥천 조씨인데, 건곡선생의 후손으로 고의 휘는 시구(時耈)다. 덕을 숨기고 의리를 행하므로 고을 사람이 처사(處士)로 불렀다. 비는 풍천노씨(豊川盧氏) 사재감(司宰監) 정호(正胡)의 딸과 밀양박씨(密陽朴氏) 재춘(在春)의 딸인데 부군은 박씨 출로 현종(顯宗) 원년(一六六○) 경자 十一월 二일에 출생하였다. 공은 성품이 온후하고 돈실하며 순량하니 처사공이 느지막에 얻은 자식이라 사랑하여 가르치니 모든 일에 법도가 있어 작은 일에 조금도 준칙에 벗어난 일이 없었으며 그의 학문도 일찍부터 모양을 꾸미거나 감정을 억눌러 기쁨을 취하는 일이 없었다.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화열한 안색으로 봉양하고 방향없이 부지런히 뜻을 받들며 아우와 누이를 더욱 사랑하여 모든 일에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돕고 종제 유성(維城)은 족숙 시하(時夏)의 아들이었는데 계부(季父) 시정(時鼎)의 후사로 입계하자 처사공이 크게 사랑하며 자기 소생과 같이 교양하니 문아(文雅)의 예망(譽望)이 있었다. 만년에 사우헌(四友軒)을 숲 사이에다 짓고 부군이 우애의 정을 다하여 두 아우와 더불어 날로 서로 그 곳에서 담락하니 현판의 사우란 말은 그 뜻을 여기에서 취한 것이 아닌가? 아들마다 효도와 공경의 도리로써 거듭 일러 가르치고 집안을 법도있게 다스려 들고 난 것을 헤아려 있고 없는 것을 분간하며 사치를 금하고 여유를 가지고 봉제사 접빈객에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며 옳은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듯 하고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더러운 것을 대하듯 하여 탐스러운 사람은 청렴해지고 게으른 사람은 주관이 뚜렷해지는 기풍이 있었다. 사람의 근심을 같이 근심해주고 사람의 즐거움을 같이 즐거워하며 매사에 탄연하여 어떤 물건이거나 용납할 수 있는 도량을 가졌으므로 호걸의 칭호를 받았다. 숙종 때에 박두세(朴斗世)가 본군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부군의 풍의에 감복하여 탁자를 설비한 것이 여러 번 있었으나 일찍 자리에 들지 말라는 경계를 고수하니 지부(知府)가 더욱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서 의심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곧장 나아가서 물었으나 부군은 끝내 공과 사가 서로 다르니 감히 질대할 수 없다고 사절하니, 성주는 그의 높은 덕과 흘륭한 처사에 탄복하였고 「장차 세상에 나가면 크게 쓰여 세상의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이름도 빛날 터인데 시골에 묻혀 몸소 농사지으며 세상을 마치려하니 참으로 분수에 맞게 도를 즐겨할 줄 아는 향방의 어진 선비다.」 하였다. 하루는 처사공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우니 부군이 초조하게 시탕(侍湯)하며 밤에도 띠를 풀지 않고 병구완을 하였지만 끝내 천수로써 세상을 뜨게 되자 거의 멸성(滅性)의 지경에 이르렀다가 집안 장로들의 권계로 그 슬픔을 참고서 처사공의 의금을 두텁게 하고 그 관곽을 아름답게 하여 마음을 흡족하게 하니 조상온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신축년 八월에 향년 六十二세로 정침에서 별세하니 묘소는 도리봉 조고 통덕랑공의 묘좌록 신좌원에 있고, 배는 청주한씨(淸州韓氏) 통정(通政) 면오(勉吾)의 딸로 갑진년 十二월 十일 출생하여 기일(忌日)은 정월 十八일이며 궁각촌(弓角村) 후 고암동(皷岩洞) 좌 강의정(崗蟻亭)등 시모 박씨(朴氏)묘 아래 해좌(亥坐)에 안장하였다. 二남을 두었고, 후배(后配) 이천서씨(利川徐氏) 명이(命履)의 딸은 신유년 十二월 八일 출생하였으며, 기일은 二월 三일이고, 묘소는 도리봉 안산 사좌이며 二남을 두었다. 광운(光耘), 동운(東耘)은 한씨출이요, 상운(相耘), 성운(成耘)은 서씨출이다. 장방은 아들이 없어 차방남 중명(重命)으로 후사를 삼고 차방남은 중명(重命), 두명(斗命), 신명(新命)이요, 三방 남은 천명(天命)이며, 四방 남은 재명(載命)이고, 증손 정량(廷良), 정인(廷仁), 광산(光山) 김수(金璲), 전주(全州) 이운(李뤲)의 처는 중명출이요, 정렬(廷烈), 정직(廷直), 승평(昇平) 박성엽(朴聖燁), 한양(漢陽) 조시량(趙時良) 처는 신명출이며, 정화(廷華)는 천명출이고 정규(廷奎)는 재명출이었다. 아! 부군은 고상한 뜻을 가지고도 영귀한 길을 사절하였고 몸을 굽히고서 남을 따르는 사의(私意)와 도를 어기고 명예를 취하는 비루한 행를 하지 않았으며, 학문을 힘써 덕을 닦고 명교중 낙지에 노닐며 몸이 맞도록 스스로 즐겨하였던 공은 저 공교한 말과 아첨한 빛으로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와는 같은 날에 말할 수 없으니 어찌 천명을 아는 달인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탄스러운 일이며 위대한 일이다. 그뒤 여러 해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전원에 묻혀 살며 청고한 생활을 하다보니 가도가 삭막하여 그 장덕 및 묘갈에 있어 아직 덕망있는 군자의 천양(闡揚)함을 얻지 못하였은즉 어찌 영원히 전하기를 바라겠는가. 이를 두려워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그 대강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七世孫 炳寬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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